Red Rose
Prefect
다시 한 번, 너와 함께

 

설서화님(@seohwa) 글 커미션


“…그러니까 이렇게 돌려보면, 스페이드 6! 하핫, 굉장하지?”
“우오옷, 이 몸의 카드를 맞췄다구!”
 
 언제나와 같은 오후의 티타임, 조금 많이 우려졌나 싶을 정도의 얼 그레이와 함께 있노라면 이게 몇 번째의 티타임인지 잊을 정도였다. 소녀, 유우에게는 특히나 몇 번째의 찻잔을 기울인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동급생이자 늘 같이 다니는 콤비 중 하나인 에이스 트라폴라가 의기양양하게 카드를 들고 온 것을 빼면.
 궁금하다고 했었지? 테이블에 앉아있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에이스가 말했다. 자신이 쓰는 카드를 집에서 보내주었다고 하며 꺼내든 카드는 끄트머리가 조금씩 닳아있어 에이스가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지 가늠이 될 정도였다. 익숙하게 카드를 섞고 바닥에 펼치는 에이스는 한 명씩(그리고 한 마리) 지목해 카드 마술을 보여주었다. 검푸른 머리의 친구나 작은 마수의 감탄소리에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진 소년이 몸을 돌려 유우를 바라보았다.
 
“자, 이젠 유우 차례. 한 장 골라봐!”
“음… 이 카드로 할까?”
 
 유우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카드를 가볍게 훑다가 한장을 빼놓고 에이스를 바라봤다. 유우, 너 혼자 보면 되거든? 보고 다시 뒤집어놔. 유우는 카드를 뒤집었다. 혹시라도 에이스가 볼세라 손으로 가리며 펼쳐본 카드 하트의 에이스. 눈앞에 있는 소년과 같은 카드였다. 뭐가 나왔어? 옆에 있던 친구들이 목을 빼고 유우가 든 카드를 훔쳐보았다.
 
“응. 확인했어.”
“좋아. 그럼 다시 뒤집고, 이번엔 네가 직접 섞어봐.”
 
 에이스의 말을 따라 유우는 천천히 카드를 섞었다. 에이스처럼 빠르고 능숙하게 셔플을 할 줄 몰라 조심스럽게 카드를 그러모아 섞어나갔다. 손 끝에 닿는 카드의 모서리들이 무뎠다. 한참 카드를 섞는데 열중한 유우를 바라보던 에이스가 유우의 손을 잡았다. 지금 손 아래에 있는 카드. 뭐일 것 같아? 설마. 에이스의 말에 유우는 맨 위 카드를 올려보았다.
 
“하트의 에이스네. 맞췄지?”
 
 우와! 또 맞췄다구! 놀라서 큰 소리를 내는 듀스와 그림 사이에서 유우 또한 감탄의 탄성을 내뱉었다. 보란 듯이 웃는 에이스와 하트 에이스 카드를 번갈아보던 유우의 눈이 빛났다. 에이스의 카드 마술은 이전의 회귀에서도 몇 번을 봐온 것이지만, 언제 보아도 탄성을 만들어냈다.
 
“대단해 에이스! 어떻게 이렇게 맞춘거야?”
“요령만 알면 쉬워. 물론! 나니까 이렇게 한 번에 할 수 있는 거지. 그래도 간단한 마술은 금방 할 수 있을걸?”
 
 한번 해볼래? 에이스의 제안에 유우는 카드 끝을 톡, 톡 건드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어려운 제안도 아니고, 모처럼이니 카드마술 정도를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보였다.


“이렇게 하면…”
 
아. 또 아니네.
 유우는 몇 번째 카드마술을 연습해보았지만, 에이스가 알려준 카드 뽑기 마술은 시도하는 족족 실패하곤 했다. 머릿속에 트릭의 흐름은 완전히 있었지만 카드를 만져본 경험이 적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 같았다. 원하는 카드를 떠올리며 카드를 뒤집어보아도 눈앞에 펼쳐진 카드는 전부 생각과는 다른 카드만 놓여있었으니.
 여러 번 루프를 반복한 유우는 뭐든 빨랐다. 소녀의 습득력 자체가 좋은 탓도 있었지만, 연차로 따지면 벌써 몇 년째. 유우는 많은 것을 반복 학습한 끝에 이미 많은 것이 익숙해져있었다. 이제는 몇 번의 시도만으로 못하는 것이 거의 없던 유우였다. 하지만 조금의 변덕으로 시작된 마술 하나가 자신을 이렇게 애먹이게 할 줄은 몰랐는지 유우는 카드마술 앞에서 약해졌다.
 계속된 마술의 실패는 어쩐지 루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과도 같아 보였다. 일상 속에서 모든 것이 쉬울 수 있지만, 궁극적인 답을 얻어낼 수 없다. 유우는 루프 속에 갇힌 기분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몇 번의 카드를 뒤집어도 원하는 카드 하나가 나오지 못해 다시금 카드를 섞는 것처럼….
 
“뭐야 유우, 그만하게?”
 
 눈에 띄게 침울해진 유우를 본 에이스는 카드를 섞지 않고 정리하는 유우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닌데? 적어도 에이스가 보는 자신의 친구는 이런 사소한 실패로 금방 무너질 사람이 아니었다. 드문 반응을 보이는 유우를 향해 에이스는 되려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가벼운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걸었다.
 
“왜 벌써 그만두려고 그래? 유우답지 않게. 간단한 거라니까?”
“나는.”
“응?”
“나는 너와 달라 에이스. 이런 카드마술 하나도 쉽게 해낼 수도 없단 말이야.”
 
 아, 저도 모르게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에이스에게 날카로운 말을 뱉어냈다.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이에게 이런 감정의 배출은 무의미하고, 유우 자신의 기분만 더 마이너스로 만드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순간적인 반응은 멈출 수 없었다. 유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당황한 기색이 되어 에이스의 얼굴을 보았으나, 에이스는 유우의 말에 무언가 고민이 생긴 듯, 눈을 꾹 감은 채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나 싶어 유우가 에이스를 바라본 몇 초, 에이스가 입을 뗐다.
 
“음…”
“저, 에이스 내가 말이 조금 심ㅎ…”
“아~! 정말이지! 유우!”
“심ㅎ…으,응?”
“나라고 뭐 처음부터 잘 한건 아니었으니까? 고작 몇 번 안된 걸로 바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나도 똑같이 그랬다고! 물론 이 몸은 센스가 좋아 금방 해낸 편이지만 말이지?
…그리고 내가 근성론 같은 말을 꺼내는건 영 아니지만 말이야, 고작 이런걸로 포기하지 말고 계속 하면 너도 금방 해낼 수 있겠지! 네 말대로 ‘이런 카드마술 하나’잖아!”
 
 짜증을 내는 듯한 목소리로 에이스가 말을 쏟아내었다. 목소리의 높이가 있을 뿐이지, 그 안에 담긴 말은 상냥한 말에 능숙하지 못한 소년 나름의 위로가 담겨있었다. 큰 꾸밈 없이 단순하고 서투른 위로는 오히려 스트레이트로 감정을 전달하는데 효과가 있었다. 에이스의 위로를 듣고 침울한 마음이 조금 가셨는지-아니면 큰 소리에 조금 놀랐던 건지-어느새 둥근 눈에는 우울이 가신 채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포기하지 않으면, 정말로 할 수 있을까?”
 
 카드 마술도. 루프와 망각도. 뒷 말은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지만 유우는 확신을 받고 싶었다. 정말로 노력만으로. 포기하지 않는 것 만으로 할 수 있는걸까?
 
“아마도, …아니! 물론 할 수 있지!”
 
한 치 틀림없는 목소리가 소녀에게 들려왔다.
 
“그러니까 집어넣은 카드 다시 꺼내고, 한 번만 더 해봐. 이번에는 될 수도 있잖아?”
“알았어 에이스. 마지막으로 해 볼테니까.”
 
 소년과 소녀 사이의 테이블에 다시 카드가 놓였다. 이번에는 할 수 있을까? 작은 의문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고, 소녀는 카드를 떠올렸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열쇠가 되어줄 조커. 오직 조커 카드 하나만을 떠올리며 카드 셔플을 시작했다.
 이내 유우는 펼쳐진 카드의 한 가운데를 골라 뒤집어보았다. 에이스는 굳이 카드를 보지 않았다. 다만 유우의 표정에 맞춰 씨익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조커가 나왔어!”
“거 봐 유우!”
“네 말대로 다시 해보니까, 그러니까 정말로 해냈어!”
“그래. 너도 할 수 있다니까 그러네!”
“…응! 포기하지 않길 잘한 것 같아!”


 이파리 끄트머리마다 이슬이 맺혀있는 아침, 에이스와 듀스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책상에 턱을 괸 채 유우와 그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림을 데리고 먼저 교실에 들어와있을 유우였을텐데. 그 녀석, 늦잠이라도 잤나? 유우가 너냐?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투닥대던 두 사람은 문소리가 나는 곳을 보더니 일제히 소란을 멈추었다.
 
“그렇게 이상해?”
 
 그림과 함께 나타난 유우는 어제와는 달랐다. 길게 늘어트린 흑발은 온데간데 없고, 어깨가 전부 드러날 길이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나타나선 태연히 웃어보였다. 어깨를 전부 덮었던 머리카락 하나가 짧아졌을 뿐인데, 제 나이에 맞는 소녀의 모습이 강조된 유우의 헤어 어레인지는 두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기 충분했다.
 
“부하가 아침부터 거울 앞에 있더니 갑자기 머리를 싹둑 잘라버렸다구!”
 
같이 온 그림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는지 호들갑을 떨며 아침 식사부터 비장해보였다느니, 씻는 시간이 좀 더 오래걸렸다느니. 아침의 상황을 조잘거렸지만 갑작스러운 시각적 변화에 놀란 하츠라뷸의 두 사람은 그림의 말에 반응해줄 수 없었다. 시도가 잘못된걸까? 아무런 소리가 없어 살짝 걱정이 되는지 유우가 머쓱하게 머리 끝을 만지작거렸다.
 
“괜찮아 보여, 에이스?”
“…어, 으응. 짧은 것도 좋네.”
“그럼 말이야.”
 
 에이스의 대답에 유우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지난번에 말했던 잘 어울릴 것 같다던 귀걸이. 아직도 팔고 있을까? 유우의 질문에 에이스가 슬쩍 웃었다. 같은 장소에 있지만 자신들을 바라보던 소녀가, 이제야 무언가를 함께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소년은 소녀의 변화를 전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게 뭐 어때서! 일단 같이 해보면 되는 거니까.
 
“오늘 학교 끝나고 보러 가보자 유우!”
“그래, 같이 가보자!”
 
 소녀가 소년을 따라 웃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미소짓는 아침이었다.

어떡하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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