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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횡단

춘자(@SWERVINSEA)님 글 커미션


무궁하게 반복되는 생에서 살을 꿰뚫는 치장은 무용하다. 억겁의 회귀를 홀로 감내하며, 뇌리를 으그러뜨리는 권태와 훼손된 살점은 비례적으로 차오르기에. 청산할 수 없는 저주는 유우의 삶을 가장자리에서부터 침범하고, 무수한 선택을 차근히 내버리도록 종용한다. 그렇기에 희망의 동의어를 발음하던 그에게 바친 애정 역시 체념의 형태로 굳어진다. 그러나 망각이 육신의 상흔마저 도려낼 수는 없으니, 기억의 잔재는 그에게 명백한 영향을 미친다. 유구한 체온의 부재는 근간조차 불분명한 불만을 낳고, 익숙한 친애 사이 간과하던 감정을 목도케 한다. 시선의 귀결이 늘 너에게로 맺어지던 이유. 도려낼 수 없는 일상의 형태가 되어, 존재의 자취를 되짚게 되던 이유. 친우親友라는 정의로는 결코 해명할 수 없는 갈증. 붉은 트럼프의 주인은 마침내 오랜 추종의 본질을 깨닫는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널 찾아왔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망설임의 불식과 경계의 횡단을 고대하는 것. 그것이 에이스가 선언하는 사랑이다.
그러니 유우, 너는 내게 한 걸음만 다가오면 돼.

구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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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너와 함께

 

설서화님(@seohwa) 글 커미션


“…그러니까 이렇게 돌려보면, 스페이드 6! 하핫, 굉장하지?”
“우오옷, 이 몸의 카드를 맞췄다구!”
 
 언제나와 같은 오후의 티타임, 조금 많이 우려졌나 싶을 정도의 얼 그레이와 함께 있노라면 이게 몇 번째의 티타임인지 잊을 정도였다. 소녀, 유우에게는 특히나 몇 번째의 찻잔을 기울인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동급생이자 늘 같이 다니는 콤비 중 하나인 에이스 트라폴라가 의기양양하게 카드를 들고 온 것을 빼면.
 궁금하다고 했었지? 테이블에 앉아있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에이스가 말했다. 자신이 쓰는 카드를 집에서 보내주었다고 하며 꺼내든 카드는 끄트머리가 조금씩 닳아있어 에이스가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지 가늠이 될 정도였다. 익숙하게 카드를 섞고 바닥에 펼치는 에이스는 한 명씩(그리고 한 마리) 지목해 카드 마술을 보여주었다. 검푸른 머리의 친구나 작은 마수의 감탄소리에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진 소년이 몸을 돌려 유우를 바라보았다.
 
“자, 이젠 유우 차례. 한 장 골라봐!”
“음… 이 카드로 할까?”
 
 유우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카드를 가볍게 훑다가 한장을 빼놓고 에이스를 바라봤다. 유우, 너 혼자 보면 되거든? 보고 다시 뒤집어놔. 유우는 카드를 뒤집었다. 혹시라도 에이스가 볼세라 손으로 가리며 펼쳐본 카드 하트의 에이스. 눈앞에 있는 소년과 같은 카드였다. 뭐가 나왔어? 옆에 있던 친구들이 목을 빼고 유우가 든 카드를 훔쳐보았다.
 
“응. 확인했어.”
“좋아. 그럼 다시 뒤집고, 이번엔 네가 직접 섞어봐.”
 
 에이스의 말을 따라 유우는 천천히 카드를 섞었다. 에이스처럼 빠르고 능숙하게 셔플을 할 줄 몰라 조심스럽게 카드를 그러모아 섞어나갔다. 손 끝에 닿는 카드의 모서리들이 무뎠다. 한참 카드를 섞는데 열중한 유우를 바라보던 에이스가 유우의 손을 잡았다. 지금 손 아래에 있는 카드. 뭐일 것 같아? 설마. 에이스의 말에 유우는 맨 위 카드를 올려보았다.
 
“하트의 에이스네. 맞췄지?”
 
 우와! 또 맞췄다구! 놀라서 큰 소리를 내는 듀스와 그림 사이에서 유우 또한 감탄의 탄성을 내뱉었다. 보란 듯이 웃는 에이스와 하트 에이스 카드를 번갈아보던 유우의 눈이 빛났다. 에이스의 카드 마술은 이전의 회귀에서도 몇 번을 봐온 것이지만, 언제 보아도 탄성을 만들어냈다.
 
“대단해 에이스! 어떻게 이렇게 맞춘거야?”
“요령만 알면 쉬워. 물론! 나니까 이렇게 한 번에 할 수 있는 거지. 그래도 간단한 마술은 금방 할 수 있을걸?”
 
 한번 해볼래? 에이스의 제안에 유우는 카드 끝을 톡, 톡 건드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어려운 제안도 아니고, 모처럼이니 카드마술 정도를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보였다.


“이렇게 하면…”
 
아. 또 아니네.
 유우는 몇 번째 카드마술을 연습해보았지만, 에이스가 알려준 카드 뽑기 마술은 시도하는 족족 실패하곤 했다. 머릿속에 트릭의 흐름은 완전히 있었지만 카드를 만져본 경험이 적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 같았다. 원하는 카드를 떠올리며 카드를 뒤집어보아도 눈앞에 펼쳐진 카드는 전부 생각과는 다른 카드만 놓여있었으니.
 여러 번 루프를 반복한 유우는 뭐든 빨랐다. 소녀의 습득력 자체가 좋은 탓도 있었지만, 연차로 따지면 벌써 몇 년째. 유우는 많은 것을 반복 학습한 끝에 이미 많은 것이 익숙해져있었다. 이제는 몇 번의 시도만으로 못하는 것이 거의 없던 유우였다. 하지만 조금의 변덕으로 시작된 마술 하나가 자신을 이렇게 애먹이게 할 줄은 몰랐는지 유우는 카드마술 앞에서 약해졌다.
 계속된 마술의 실패는 어쩐지 루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과도 같아 보였다. 일상 속에서 모든 것이 쉬울 수 있지만, 궁극적인 답을 얻어낼 수 없다. 유우는 루프 속에 갇힌 기분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몇 번의 카드를 뒤집어도 원하는 카드 하나가 나오지 못해 다시금 카드를 섞는 것처럼….
 
“뭐야 유우, 그만하게?”
 
 눈에 띄게 침울해진 유우를 본 에이스는 카드를 섞지 않고 정리하는 유우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닌데? 적어도 에이스가 보는 자신의 친구는 이런 사소한 실패로 금방 무너질 사람이 아니었다. 드문 반응을 보이는 유우를 향해 에이스는 되려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가벼운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걸었다.
 
“왜 벌써 그만두려고 그래? 유우답지 않게. 간단한 거라니까?”
“나는.”
“응?”
“나는 너와 달라 에이스. 이런 카드마술 하나도 쉽게 해낼 수도 없단 말이야.”
 
 아, 저도 모르게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에이스에게 날카로운 말을 뱉어냈다.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이에게 이런 감정의 배출은 무의미하고, 유우 자신의 기분만 더 마이너스로 만드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순간적인 반응은 멈출 수 없었다. 유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당황한 기색이 되어 에이스의 얼굴을 보았으나, 에이스는 유우의 말에 무언가 고민이 생긴 듯, 눈을 꾹 감은 채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나 싶어 유우가 에이스를 바라본 몇 초, 에이스가 입을 뗐다.
 
“음…”
“저, 에이스 내가 말이 조금 심ㅎ…”
“아~! 정말이지! 유우!”
“심ㅎ…으,응?”
“나라고 뭐 처음부터 잘 한건 아니었으니까? 고작 몇 번 안된 걸로 바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나도 똑같이 그랬다고! 물론 이 몸은 센스가 좋아 금방 해낸 편이지만 말이지?
…그리고 내가 근성론 같은 말을 꺼내는건 영 아니지만 말이야, 고작 이런걸로 포기하지 말고 계속 하면 너도 금방 해낼 수 있겠지! 네 말대로 ‘이런 카드마술 하나’잖아!”
 
 짜증을 내는 듯한 목소리로 에이스가 말을 쏟아내었다. 목소리의 높이가 있을 뿐이지, 그 안에 담긴 말은 상냥한 말에 능숙하지 못한 소년 나름의 위로가 담겨있었다. 큰 꾸밈 없이 단순하고 서투른 위로는 오히려 스트레이트로 감정을 전달하는데 효과가 있었다. 에이스의 위로를 듣고 침울한 마음이 조금 가셨는지-아니면 큰 소리에 조금 놀랐던 건지-어느새 둥근 눈에는 우울이 가신 채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포기하지 않으면, 정말로 할 수 있을까?”
 
 카드 마술도. 루프와 망각도. 뒷 말은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지만 유우는 확신을 받고 싶었다. 정말로 노력만으로. 포기하지 않는 것 만으로 할 수 있는걸까?
 
“아마도, …아니! 물론 할 수 있지!”
 
한 치 틀림없는 목소리가 소녀에게 들려왔다.
 
“그러니까 집어넣은 카드 다시 꺼내고, 한 번만 더 해봐. 이번에는 될 수도 있잖아?”
“알았어 에이스. 마지막으로 해 볼테니까.”
 
 소년과 소녀 사이의 테이블에 다시 카드가 놓였다. 이번에는 할 수 있을까? 작은 의문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고, 소녀는 카드를 떠올렸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열쇠가 되어줄 조커. 오직 조커 카드 하나만을 떠올리며 카드 셔플을 시작했다.
 이내 유우는 펼쳐진 카드의 한 가운데를 골라 뒤집어보았다. 에이스는 굳이 카드를 보지 않았다. 다만 유우의 표정에 맞춰 씨익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조커가 나왔어!”
“거 봐 유우!”
“네 말대로 다시 해보니까, 그러니까 정말로 해냈어!”
“그래. 너도 할 수 있다니까 그러네!”
“…응! 포기하지 않길 잘한 것 같아!”


 이파리 끄트머리마다 이슬이 맺혀있는 아침, 에이스와 듀스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책상에 턱을 괸 채 유우와 그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림을 데리고 먼저 교실에 들어와있을 유우였을텐데. 그 녀석, 늦잠이라도 잤나? 유우가 너냐?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투닥대던 두 사람은 문소리가 나는 곳을 보더니 일제히 소란을 멈추었다.
 
“그렇게 이상해?”
 
 그림과 함께 나타난 유우는 어제와는 달랐다. 길게 늘어트린 흑발은 온데간데 없고, 어깨가 전부 드러날 길이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나타나선 태연히 웃어보였다. 어깨를 전부 덮었던 머리카락 하나가 짧아졌을 뿐인데, 제 나이에 맞는 소녀의 모습이 강조된 유우의 헤어 어레인지는 두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기 충분했다.
 
“부하가 아침부터 거울 앞에 있더니 갑자기 머리를 싹둑 잘라버렸다구!”
 
같이 온 그림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는지 호들갑을 떨며 아침 식사부터 비장해보였다느니, 씻는 시간이 좀 더 오래걸렸다느니. 아침의 상황을 조잘거렸지만 갑작스러운 시각적 변화에 놀란 하츠라뷸의 두 사람은 그림의 말에 반응해줄 수 없었다. 시도가 잘못된걸까? 아무런 소리가 없어 살짝 걱정이 되는지 유우가 머쓱하게 머리 끝을 만지작거렸다.
 
“괜찮아 보여, 에이스?”
“…어, 으응. 짧은 것도 좋네.”
“그럼 말이야.”
 
 에이스의 대답에 유우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지난번에 말했던 잘 어울릴 것 같다던 귀걸이. 아직도 팔고 있을까? 유우의 질문에 에이스가 슬쩍 웃었다. 같은 장소에 있지만 자신들을 바라보던 소녀가, 이제야 무언가를 함께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소년은 소녀의 변화를 전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게 뭐 어때서! 일단 같이 해보면 되는 거니까.
 
“오늘 학교 끝나고 보러 가보자 유우!”
“그래, 같이 가보자!”
 
 소녀가 소년을 따라 웃었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미소짓는 아침이었다.

어떡하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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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바람, 그리고 너

몽치(@mongchi_cmcm)님 타로 커미션


매미가 울었다. 여름이었다ー

 
에이스는 이번 여름 방학을 그닥 기대하고 있지 않아요. 집으로 돌아가면 또 형에게 시달려야 할 거라느니, 동생의 삶은 고달프다느니 하며 투덜댑니다. 물론 진심은 하나도 담겨 있지 않지만요. 에이스에게 있어서 여름 방학은 유우와 만날 수 없는 기간이에요. 동시에 유우가 어딘가로 사라져버리지 않을 까 걱정해야 하는 기간입니다. 에이스는 아직도 어느 날 유우가 보낸 문자를 기억하고 있어요. 스카라비아 기숙사에 갇혔다는 문자는 제대로 끝맺음도 못한 채로 에이스에게 당도했고, 에이스는 그 길로 즉시 저금통을 털어 학교까지 달려왔습니다. 그 이후로 여름만 되면 유우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지 않을 까, 뜨거운 햇살에 그대로 녹아버리진 않을까 하는 얕은 걱정이 감돌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유독 여름 방학을 싫어하는 눈치네요.

여름 방학이 기대되지 않는 건 유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몇 번째 겪는 여름 방학인지, 어느 순간부터 유우는 셈을 포기했어요. 이번 여름 방학에도 할 일이 많습니다. 낡은 기숙사 청소에, 크로울리에게서 받은 잡무에... 이번 여름 방학에도 홀로 낡은 기숙사에서 보내야 할 겁니다.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학교가 텅 비는 기간, 유우는 그 시간이 지겹도록 싫었어요. 이 세상에서 자신이 혼자라는 느낌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그런 유우와 함께해주는 그림이 있어 다행이지, 그림마저 없었다면 유우는 정말 미쳐 버렸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이번 방학도 잘 견디고 견뎌서, 친구들이 학교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쁘게 맞이할 것입니다.

그렇게 별 기대 없이 시작된 여름방학이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유우에게는 변화가 생겼습니다. 바로 에이스가 낡은 기숙사에 놀러 온 거예요. 가족끼리 현자의 섬에 바캉스를 왔는데, 마침 유우의 생각이 나서 들렀다나요. 에이스는 부모님 허락도 받고 왔으니, 오늘 하루는 낡은 기숙사에서 자고 가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갑작스런 방문, 갑작스런 제안. 루프의 안정성을 중시하던 이전의 유우였다면 가장 기피하고 싶었던 상황이겠지만 어쩐지 이번엔 그렇게 싫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누군가 찾아와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에이스가 어떻게 알고 온 것인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읽는 마법이라도 익힌 걸까요. 유우는 기쁘게 에이스의 방문을 맞이해요.

왜 하필 바캉스를 학교가 있는 곳으로 오냐며 투덜대는 에이스와, 새삼스럽게 자신과 그림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집을 채우자 들뜬 유우입니다. 두 사람은 함께 쿠키를 먹고, 영화를 보고, 보드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요. 에이스는 이번에 중학교 친구들과 만났는데, 그 곳에서 자기한테 고백했던 여자애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유우에게 꺼냅니다. 유우는 그런 이야기들이 마치 자신과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아서, 드라마를 보듯 빠져들었어요. 매일이 다른 생활, 루프하지 않는 삶, 언젠가는 유우에게도 찾아오겠거니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유우의 반응을 떠 보려고 한 건데, 생각보다 유우가 덤덤하게 나와서 괜히 말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마 에이스 머릿속은 엄~~청 복잡할 거예요. 유우는 진짜 자신을 편한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유우의 앞에서 너무 어린애처럼 군 건 아닌지 여러모로 곤란해 보입니다. 유우는 다양한 경험을 한 에이스가 부러워서 정말 아침드라마 보듯 이야기를 들어 준 것 뿐인데도요. )  

에이스는 유우에게 있어서, '매일이 다른, 루프하지 않는 삶'의 체험판을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에이스와 있으면 매일이 새롭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으니까요. 때문에 유우는 에이스에게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낡은 기숙사를 찾아와 주어 고마워하고 있어요. 이를 에이스에게 말했다가는, 역시 이 오빠가 최고라느니 어쩌느니 하며 콧대가 높아질 게 분명해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해가 지자, 영화를 한 편 틀어 놓습니다. 에이스는 이번에 새로 개봉한 영화라며, 유우와 보려고 이제껏 안 보았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밝은 음악으로 시작하는 코미디 로맨스 영화. 어쩌면 뻔한 내용에 뻔한 결말일 수 있는 한 시간 삼십 분짜리 영상물, 그러나 유우에게 있어서 이 영화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유우는 그간 수 번의 여름 방학을 반복했지만, 지금까지 여름 방학 중에 영화가 개봉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거든요. 어쩌면 다음부터는 같은 여름 방학을 반복하지 않아도 될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루프를 벗어난 것일지도 몰라요. 어쩌면 유우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영화는 흘러갔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유우의 손을 에이스가 꼬옥 잡아 주었습니다.

에이스는 순간 놀랐어요. 유우가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복잡한 표정을 하곤, 화면 너머를 바라보는 것 같았거든요. 유우는 가끔씩 이렇게 에이스의 곁을 떠나곤 했습니다. 그리곤 에이스가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으면, 살짝 웃곤, 아무것도 아니라고 화제를 바꾸곤 했어요. 에이스는 유우의 이런 점이 싫었습니다. 기껏해야 동갑내기처럼 보이면서 혼자 어른스러운 척 하는 이레귤러. 분명 함께 있는데도 함께 있지 않은 것 같은 이 순간이 너무 싫어서 에이스는 자꾸만 유우를 현실로, 에이스의 곁으로 끌고 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고요. 유우가 이대로 자신이 모르는 세계로 떠날까 두려워 끊임없이 유우를 부르고, 유우에게 어울릴 옷을 추천해 자신의 기억과 흔적을 남기려 들어요. 멋모르는 유우는 에이스의 흔적을 고스란히 받아 줍니다.

결국 유우는 영화의 내용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 했어요. 그렇게 에이스가 잘 방을 안내해 주고, 에이스가 언젠가 생일 선물이라고 주었던 피어싱을 빼고, 에이스가 추천해 주었던 클렌징 폼으로 세수를 하고 침대에 눕습니다. 그리곤 생각해요. 유우는 에이스의 손을 잡음으로써 길고 길었던 토끼굴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정말 1%도 되지 않는 확률이었지만, 0%는 아니었기에 이루어진 거예요. 유우에게 있어서 에이스는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시와도 같습니다. 유우는 쿵쿵 뛰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잠에 들었어요.

에이스는 복잡한 표정을 한 채로 다음 날 돌아갔습니다. 유우는 루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그런 에이스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 했어요. 그대로 맞이한 개학, 학교는 다시 붐비게 되었지만 유우는 이 순간이 이전처럼 기다려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왁자지껄한 친구들 없이도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게 가능해졌으니까요. 이번에야말로 루프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놀랍게도 유우는 모든 것이 새로워 보이기 시작합니다. 늘 가던 학교, 늘 걷던 길, 몇천 번이고 돌려봐 이제는 내용을 다 외운 교과서들 유우는 이대로 진급하고, 가능하다면 다른 선배들처럼 학외 연수를 갈 수도 있고, 어쩌면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 실낱같은 희망은 순식간에 불어나서, 유우를 행복에 퐁당 빠뜨려요.

하지만 에이스는 그런 유우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 날 영화를 본 이후로부터 갑자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거든요. 유우가 밝아진 건 좋습니다. 하지만 에이스의 바운더리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다는 느낌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어요. 그간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고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유우는 아주 가볍게 그 선을 넘어 자신의 세계로 뛰어들어 버렸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 날 낡은 기숙사를 찾아가지 말 걸,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영화를 보여주지 말 걸. 이럴 줄 알았다면 유우에게 특별한 나날을 만들어주지 말 걸. 에이스는 자신이 제공하는 '특별함' 이, 유우가 루프 중에 있었기에 특별하게 느껴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루프에서 벗어난 이상, 에이스와 함께하는 나날은 더 이상 유우에게 특별하지 않아요. 유우에게는 매일이 새로우니까요. 에이스는 유우가 자신을 특별한 상대로 여겨주길 바랍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유우를 토끼굴 속에 두고 자신만을 바라보게 할 걸 그랬습니다 그런, 조금은 무거운 질투가 에이스의 마음에 내려앉아요.


추가질문


Q. 이후 유우가 에이스에게 호감을 많이 드러내나요?
A. 아무래도 에이스는 동급생이기도 하고, 붙어다니는 시간이 많아서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의지한다거나 많이 편하게 대하고 있어요. 에이스는 이걸 알기 때문에 유우는 자신을 믿고 있다고 좀 우쭐해 있습니다. 친한 친구에게 의지받는 건 기쁜 일이니까요. 동시에 유우는 자신이 루프에서 벗어난 원인이 에이스인걸 알고서 확실하게 호감을 표시해요. 일종의 감사를 전하는 것과도 같달까요. 그런데 이게 에이스에게는 좀 갑작스러워서, 에이스는 유우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착각하거나 겹쳐보고 있다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유우가 고백했을 때도 구태여 거절한 모양이네요.

Q. 에이스의 질투는 티가 많이 나는 편일까요?
A. 티가 많이 나요. 에이스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요. 들뜬 유우에게 오늘 기분 좋아 보인다고 괜히 투덜대거나, 왜 오늘은 자기랑 같이 밥 안 먹느냐던가 상당히 사소하고 유치한 이유로 질투해요. 사실 에이스도, 그간 유우의 일순위였는데 갑자기 차례에서 벗어난 듯한 기분이 영 찝찝합니다. 완전 어미 닭을 쫓는 병아리처럼 굴던 게 하루아침에 곁을 떠나 하늘을 날고 있는 걸 보는 기분이에요. 처음에는 유우가 아닌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요.
이를 유우가 눈치채는 덴 시간이 좀 걸리지만 만약 알아차리게 된다면 에이스도 자신과 같은 마음인 줄 알고 고백하게 됩니다. 하지만 에이스는 유우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고 내색하진 않았지만, 유우는 제법 상처받는다고 해요. 때문에 당분간 에이스를 퉁명스럽게 대하기도 합니다. 

질투 에피소드라고 하면, 유우는 그동안 에이스를 굉장히 따르는 느낌이 없지않아 있었어요. 루프 속에서 에이스만이 가장 먼저 유우에게 말을 걸어 주었으니까요. 때문에 그림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상대였습니다. 그러나 루프가 끝났음을 인지한 후, 유우는 조금 더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평소 이야기를 나눠 보지 않은 친구 옆으로 자리를 옮겨 보기도 하고, 에이스가 추천해주지 않았던 새로운 메뉴에 도전해보기도 하며 조금씩 '유우' 만의 삶을 만들어 나갑니다. 그런데 에이스는 이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자신이 추천해 주지 않은 나폴리탄을 먹고 있는 유우에게, '그거 맛있나 봐?' 라고 톡 쏘아붙인 적이 있습니다. 유우는 순간 맛있다고 긍정했고, 에이스는 그대로 일어서서 식당을 나가버렸어요. (유우:아무고토모름) 에이스는 나중에 자신이 어린애 같았다는 걸 인정했지만, 이를 유우에게 사과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마음이 시끄러운 모양이네요.

Q. 유우의 고백을 거절한 뒤의 둘의 모습은 어떨까요?
A. 고백을 거절한 후로부터 급격하게 저주가 시작되어서 바로 뒷작업을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자신이 왜 유우만을 바라보고 있는지, 유우에게 이유 모를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는 점을 서서히 잊습니다. 유우는 그런 에이스의 변화를 보며, 드디어 올 게 왔다고 생각하고요.
에이스는 달라진 유우를 보며 원래 애가 이렇게 활발했나?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직접적인 원인을 기억해내지 못합니다. 동시에 유우에게 살짝 찝찝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왜인지는 모르면서-괜히 유우에게 너스레를 떨며 좀 더 챙겨주려고 해요.
정작 이러고 나중에 후회함

신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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